순님께 드립니다.



 1. 란지에는 둔감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감상을 위한 감각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스쳐지나간 느낌은 재가 되어 날아가고 기억은 그보다는 조금 더 오래 남았다. 다만 그도 사람인지라 쾌적한 환경을 선호하기는 했다. 조슈아를 만난 것은 란즈미에게 보낼 편지를 쓸 좋은 자리를 찾아서 교사 뒷편을 걸어다니고 있던 아침 무렵이었다. 뭘하고 있었는지 그는 숲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셔츠깃을 풀어헤치고, 걷어올린 바지자락은 이슬에 젖은 듯 했다. 오묘한 잿빛 머리카락이 햇살 아래서 희게 빛났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잠깐 스쳐간 시선 속에서 뺨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란지에는 눈동자 대신 그의 맨발을 보았다. 희고, 갸름했다.


"좋은 아침."


 조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하고는 란지에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달려갔다. 곁을 스쳐지나가는 그에게서 풀냄새가 났다. 그보다는 숲의 냄새, 싱그럽다는 표현을 써도 좋을테지만 란지에 본인은 싱그러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향이 어떤 향이었나. 란지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였다. 감각을 음미하고 있었다. 예민한 그의 오감이 풀잎과 돌과 이끼와 이슬 냄새 아래에서 이질적인 향 하나를 구분해 낼 때까지. 그리고 어떤 '감상'에 도달했을 때 란지에의 마음은 무척 불편해졌다. 그는 조슈아가 간 데 없이 자취를 감춘 방향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멀쩡히 나있는 길을 놔두고 숲 속으로 다니다니 이상한 사람, 하는 평가도 빼먹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란지에의 마음 깊숙한 곳 닫혀진 문을 두드린 것은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랜 신뢰도, 사려깊은 이해와 배려도 아니었다. 한 소년의 체취였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가 가까이에 와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거나 손가락을 움직일 때,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셔츠가 살갗위에서 미끄러질 때 그것은 가히 폭력적인 수준이었다. 란지에는 향수 냄새 속에서 늘 그 날 아침에 잔상처럼 남은 조슈아의 체향을 찾았다. 호감일까, 탐욕일까. 어느쪽이든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아니 스스로 배제했던 종류의 감정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상대가 조슈아라는 점이 란지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2. 갑작스런 비였다. 조슈아는 창밖으로 하늘을 살폈지만 아무래도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한숨을 쉬었다. 눅눅해라. 과연 오늘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도로로록, 소리를 내며 내려온 손가락이 젖은 나무 창틀에 닿고 차가움을 느낌과 동시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조슈아."


 돌아보자 란지에가 수건을 들고 서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네냐플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단칸방으로, 여관에 가본적이 없는 조슈아는 여관인가보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사실 란지에의 일과 관련된 누군가의 건물이었다. 학교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이 여관(아마도) 주인이 란지에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라 의아하긴 했다. 그래도 조슈아는 란지에가 알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려고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더 묻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란지에는 선뜻 주지 않고는 수건을 조슈아 머리 위에 덮고 슬슬 털어주었다.


"묘한 냄새가 나네."

"갈아입을 옷을 구하는 것까진 무리인 것 같아. 이 시간엔 마차도, 빗 속을 걸어가는 것도 무리지. 오늘은 이 곳에서 하루 묵어야 되겠는데."

"글쎄. 젖은 옷을 입고 자는 것보단 그냥 걸어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란지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던 머리에서 대충 물기가 가시자 이번엔 조슈아가 일어섰다. 란지에는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조슈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옷은 벗어서 말려야지."

"...."

"...."

"이런."


 조슈아도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미 해는 졌고, 비는 거세게 내리고, 기숙사 문이 닫기기 전에 돌아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잠깐 사이에 쫄딱 젖어선 급하게 란지에 손에 이끌려 들어온 이 곳은 지붕이 있다는 것 외에는 크게 감동적인 구석이 없는 장소였다. 조슈아는 한 사람 눕기도 빠듯해보이는 침대를 한 번 보고 란지에를 한 번 봤다. 


"어색한데...."

"...."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내면 더 어색해지는 걸 모르니? 

란지에로서도 별로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창밖을 보며 막군이 걱정할텐데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있는 조슈아의 입술이 거의 보랏빛인 것을 보고 빨리 이 문제를 해결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수가 없잖아. 얼굴이 창백해. 내려가서 마실 걸 좀 얻어올테니 먼저 침대에 들어가 있어."

"어어?"


 조슈아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란지에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진짜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조슈아는 젖은 옷가지를 하나씩 벗으면서 생각했다. 기분이 이상한데. 이건 마치...그러니까 이건...


 맨 몸으로 낯선 침대에 눕는 건 몹시 어색했다. 그보다 더 어색한 건 이제 막 친해진 학교 친구가 이불을 코밑까지 당겨 덮고 있는 자신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컵에 담긴 스프를 내민다는 점이었고 가장 심각한 건 둘이 벗은 채로 한 침대에 붙어 자야한다는 점이었다.

조슈아는 별 수 없이 이불을 돌돌 말아 일어나선 스프를 몇 모금 홀짝였다. 눈이 잠깐 마주쳤지만 오가는 말은 없었다.


"란지에 너도 춥겠다. 얼른 들어와."


 후 불어서 등불을 끄자 갑자기 소리마저 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빗소리, 아주 희미한 속삭임, 시트가 부시럭대는 소리, 젖은 옷이 몸에서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 자신의 숨소리가 크게 울렸다. 조슈아는 따끈한 가슴팍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져 가까이 가져간 손으로 버릇처럼 흉터를 매만졌다. 그리고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란지에가 침대에 들어왔다.

조금이지만 몸이 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란지에는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민망할 상황에 지금 옆에 누운 자가 다름아닌 조슈아 폰 아르님이라니. 무엇보다 그의 냄새가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살냄새. 비에 젖은. 조금 고개를 돌리자 벽 쪽으로 고개를 젖힌 조슈아의 흰 뺨과 귀와 목덜미가 보였다. 오랜 세월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왔던 아름다움이 순간에 빛을 불어넣었다. 


"잘 자."


대답을 하자 미소짓는 입술이 보였다. 진한 향에 머리가 어지러워 란지에는 눈을 감았다. 


*


아침이었다. 란지에는 잠에 취해서 먼저 일어난 조슈아가 떠난 자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향을 갈급하게 들이마셨다고 해도 좋다. 하얀 시트 위로 하늘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마디진 손가락이 남은 온기를 그러쥐었다.


"좋은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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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분께서 익명으로 해달라고 하셔서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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